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으로 고려 시대에는 '촉석정'으로 불렸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 와서야 지금의 이름인 진주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며, 성안에는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국립진주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유적과 시설이 갖춰져 있다.
진주성과 관련된 큰 역사적 사건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선조 25년(1592), 김시민 장군의 주도하에 3,800명의 성민과 군사가 힘을 합쳐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이 가장 유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이듬해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7만여 명의 민, 관, 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 했던 가슴 아픈 역사도 품고 있다.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켜가고 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김시민장군전공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인 의기사 등 총 12점의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또한 성 내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임진왜란 관련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진주에서 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에 기원하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때. 성 밖의 의병 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그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 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 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병사들과 사민의 매운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면면히 이어져 오늘의 진주남강유등축제로 자리잡았다.
[주요행사]
- 초혼점등
- 소망등달기
- 유등띄우기
- 추억의 유등 띄우기
- 세계풍물등, 한국등 전시
- 창작등 전시
- 1592진주성 등(燈)전시